2008년 12월 31일 수요일

대한민국 연가 (업뎃예정)

mbc파업의 영향탓인지 예전에 했던 추성훈,김장훈 관련 다큐 프로그램을 어제 운동하면서 보게 됐다.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한국이라는 조국이 개인에게는 슬픔이었을 텐데, 추성훈은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국 국기와 일장기를 양 팔에 달고 경기에 서는 것이다.

가수 김장훈은 정부가 지키지 못한 독도를 지키겠다고 사비를 털어 대한민국 독도를 세계에 홍보하고 나섰다.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큐탄하는 것 보다 앞서 자발적으로 나서 독도라는 국적을 찾기 위해 나선 것.

얼마전에 아침프로에서 우주에 다녀온 김소연씨가 지구에 귀환해서 한국 국가가 나오는데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고백을 했다. 심지어 대형마트에 걸린 태극기만 봐도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온다는 체험적 기억을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나는 나감해졌다.

나 역시 촌스런 국가주의를 이성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지난 올림픽 때 우리 금메달리스트들이 높은 단상에 올라가 게양된 한국국기를 바로보고 선 모습을 보고 뭉클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땅의 국민들에게 조국이라는 것의 의미. 실체적인 혜택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조국'이라 했을 때 갖게 되는 뜨거움 혹은 경건함의 실체.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오래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지 모르겠다.

열망과 열정의 조건

이것도 글로 써보고 싶은 주제.
모 교수님께서 '나이가 들 수록 나는, 열망할 것을 열망한다'라고 하셨다던가.
등따숩고 배부른 나에게 전하는 어떤 메시지가 될 것이다.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보자.

'침묵하는 다수'에 대한 견해 (업뎃 예정)

새해 아침 가족들과 떡국을 먹는 아침식사 자리.
마침 흘러나오는 뉴스는 언론노조 파업과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쟁점법안 문제여다.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와 시사문제를 두고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어다.
가능하면 아버지와 그런 종류의 대하는 피하는 것이 옳았는데 오늘은 그저 대화수준의 토론이 이어졌던 것. 흥미로운 점은 아버지가 내세운 '침묵하는 다수'를 근거로 든 민주주의론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더 정리해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생각난 문제에 대해서 이슈만 던져본다.

'침묵하는 다수'에 대한 견해.(updateed

새해 아침, 가족들이 모두 둘러 앉아 떡국을 먹는 풍경.
TV뉴스에서 마침 나온 언론노조 파업소식과 쟁점 법안 국회 통과가 안되고 있다는 소식을 보고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와 세계관이 쏟아졌다. 학창시절부터 정치적 견해가 달라 어느 때부터 뉴스를 평하는 견해는 가능하면 아버지와 하지 않곤 했는데 오늘은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형태의 토론이 간단히 벌어졌다.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침묵하는 다수'를 근거로 드는 아버지의 민주주의론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2008년 독서 목록(하반기 중심으로)

글쓰기 특강/강준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
생각의 탄생 /
다산/ 에코의 서재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한국 근대사 산책 1~5/강준만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글로벌차이나
우리문화박물지/이어령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한국 근대사 산책 1~5 / 강준만
집단지성 / 피에르 레비
성찰하는 진보 / 조국
대국굴기 / 왕지아펑 외 7인
발자국 / 고종석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 / 패트릭 J 기어리
글로벌 차이나 / 이 종민
디아스포라 기행 / 서경식
행복한 실천 / 서화숙
살아있는 민주주의 / 프란시스 무어 라페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
배신 / 정혜신 외
세계지성과의 대화/ 이어령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강요된 신회 (세계화와 진보 경제정책)
젊음의 탄생/ 이어령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 /
화폐전쟁/ 쑹훙빙
미래를 말하다 / 폴 크루그먼
슈퍼자본주의 / 로버트 라이시
조직의 재발견/ 우석훈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아담 쉐보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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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이후부터 읽은 책들이다. 생각보다 양적으로는 많이 읽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해에 비해서는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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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직 노동자로 만 2년 반을 꼬박 일하면서 책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내가 책에서 멀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처음에는 몸이 고단하고 격심한 노동강도로 느껴지던 업무 탓에 등따숩고 배부른 일들에 가히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다. (이를테면 두피 마사지라던가 등마사지, 보양음식과 한가로운 여행 등등) 그러다가 이제 몸도 좀 편해지고 과거에 비해 여가를 좀 가질만 할 즈음에는 효용없는 놀이(인터넷서핑하기, 쇼핑하기, 친구 만나 지리한 수다떨기, 반복되고 비효율적인 고민으로 침실에 누워있기 등등)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 (이는 차후에 자세하고 인상적으로 글을 써 볼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된다)을 맞이하여 나는 드디어 자발적 실업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게 여름의 끝자리에 나는 책을 읽었다.

퇴사를 하기 한 달 전부터 나는 이른바 책 열병에 시달렸는데 여기를 보고 저기를 봐도 나의 무식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 무식함에 몸이 떨릴 때 마다 나의 지적 호기심도 비례하여 상승했다. 무지하다는 부끄러움보다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이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꼭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마치 시간만 한없이 주어지면 열심히 공부 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그래, 내게는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아홉시에 출근해 때로 정시에 퇴근, 때로 야근을 하는 것. 중간중간 눈치보며 인터넷을 하고 군것질을 하는 일상, 비효율적인 업무시스템으로 아주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아주 천천히 굴러가는 거대한 공룡조직 등등. 갓 승진한 말단 직원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항상 조기성숙한 편이었던 나로서는 그런 갑갑증에 목이 조여오던 순간이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사실 이쯤되어서 나의 진로고민은 그 일이 너~무 하고 싶다기 보다는 그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일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확신-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을 더 늦전, 정말 더는 늦어서 다시 시작하기가 두려워질 수 있는 나이가 오기전에 한 번 해봐야 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되었다. 이상은 없었지만 훗날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내게 기회를 한 번 주고 싶다는 그 생각이 학교 때 빈둥대느라 읽지 못했던 책을 맘껏 읽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핑계와 만나면서 확고한 의사결정으로 진화했던 것.

그래서 나는 다소 번거로운 절차를 통해 퇴사를 했다. 두려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기쁘고 행복했다. 퇴사후 2달 가까이는 도서관에 출퇴근하며 책을 읽었다. 모 대학 중앙도서관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면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나도몰래 나왔다.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을 닮았을 것'이라던 보르헤스의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토론하고 글을 쓰고 또 책을 읽었다. 자극이 되었다. 나이만 들었지,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자괴감이 내가 전진하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여튼, 비약하기 위해 공고하게 움츠린 시간이었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간들 사이사이에는 이내 나태해진 삶도 있었다. 하루를 마지막같이 소중하게 여기자는 첫마음을 잊고 빈둥댔던 시간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두 달간은 운동도 제법 성실하게 하고, 못 보던 지인들도 종종 만나고,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했던 시간은 되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보낸 시간들이 많아 좋았다. 아주 오래만에 가족들과 공연도 보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녀왔다. 대화도 훨씬 많이 했다. 가족들을 위해 요리도 만들어봤다. 이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없다.

지난 여름, 회사를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 당장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는 해보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더 늦으면. 이 단순하고 솔직한 마음이 나에게 반년에 가까운 휴식을 주었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해 볼 기회를 갖게 됐다. 가장 바라던 장소는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우선 기뻐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딪치면서 거듭나는 기회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지난 반년 가까운 시간을 돌아보니, 보람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아쉬움은 이제 차차 보완하고 완성하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 준 부모님과, 전 직장 동료들과 상사들, 그리고 쏘울메이트에게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마음으로 전하고 싶어진다.

'하이브리드'와 '에너지'

지금은 한국시간으로 1월 1일 오전 10시 3분.

2009년 이슈를 분석하는 특집기사가 자주 눈에 띈다.
아침에 읽은 연합뉴스 <위기를 기회로>특집기사를 보니 신성장동력을 '융합, 즉 하이브리드'라 분석하고 있었다. 비슷한 주제로 지구 온난화나 에너지 위기 등은 미래적 위기라는 직감이 든다.

지난해, 그러니까 2008년. 공식적으로는 4개월, 비공식적으로는 5개월 가량 한량으로 지내면서 늦은 아침 재방송으로 방영되던 SBS 특집방송 '코난의 시대'를 읽고 나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며칠 후 도서관에서 '코난의 시대, 아톰의 시대'류의 책을 들쳐봤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만화에서 에너지박사가 코난을 옆에 세우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미래인류의 재앙'이라는 말을 바람에 날리며 전하던 것이 협박의 장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갑갑증이 느껴지지만 새롭게 세워져야 할 정치의 위기,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의 위기. 이것들을 풀어가는 키워드로 '하이브리드'와 '에너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지.

2005년도의 한가로웠던 시간.
2006년부터 2008년 여름까지 경험한 첫 직장의 추억.
2008년 하반기가 철 든 머리와 가슴으로 내공을 다진 시간이었다면
2009년부터는 지난 한량의 시간들을 회복하고 나를 담금질해 꽃피우는 일을 해야 할 터다.
내게도 '하이브리드'적 상상력과 식지 않는 '열망의 에너지'가 키워드가 될 것이라는 뜻.

2008년 12월 30일 화요일

(review) 12월에 본 영화들




눈 먼 자들의 도시














로큰롤 인생













과속 스캔들










(Revew) 잘자요, 엄마.


NIGHT MOTHER written by Marsha Norman
12월 30일 화요일 8시 @원더스페이스.







엄마 델마역 : 예수정님
딸 제시역 : 황정민님




'펑펑 울면 어떡하나'
'엄마가 슬퍼져서 돌아오게 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을 하며 보러 갔다.
1월 4일까지 한다는 소리를 듣고 좋은 좌석이 날 때를 기다려 냉큼 갱년기에 들어선 박여사님과 함께 간 것.

아주 일상적인 삶속에서 소통이 막힌 모녀의 비극이 그려졌다.
당연히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래서 행복과 불행까지 간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엄마의 좌절과 딸의 상처가 뒤범벅이 되면서 어느 지점부터 고통이 관객에게 전이가 된다. 배우의 훌륭한 연기 덕이었겠지만 관객석 곳곳에서는 많이 흐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히 보고 나서 우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우리 박여사님은 '연기를 참 잘하더라~'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엄마에게 이 연극은 어떤 의미였냐고 내가 다그쳐 물으니 델마와 제시가 아웅다웅 하는 모습이 꼭 엄마와 나의 모습같더라며 '제시의 자상함'을 내가 꼭 닮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엄마에게 '우린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델마가 울부짖은 것처럼 엄마들은 딸이 마치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통이 버거운 것'이라고 호소했다. 엄마는 물론 머리로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만 딸의 삶과 행복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두고 볼 수 없는 것 또한 당신들께는 숙명이기 때문에 차라리 받아들여야 할 비극이라는 이야기를 하신다.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갔기 때문일까. 연극에 기대 펑펑 눈물을 쏟고 싶은 무의식 탓이었는지 조금 싱겁다는 생각을 했지만, 우리 모녀처럼 평소에도 너무 솔직하고 전투적인 관계가 아닌, 누군가 한쪽에서 끙끙앓고 속을 드러내지 못해 곪아있었던 모녀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작품이었을 것 같다.

너무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08년의 끄트머리에서 박여사와 나는 대학로에서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격하게 삶을 파고드는 비상식의 놀라움.

#1. 당분간 못 누릴지도 모르는 여유를 만끽하고자 남들 일하는 시간 커피숍에 한가로이 앉아 책도 보고 글도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탐스러운 우유거품이 든 라떼를 반 이상 마시고 짜릿하게 추운 바깥날씨에 손을 호호 불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따뜻한 공간에서 머쓱하게 바라보며 아주 소박한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던 것. 그러니까, 나는 빨간 스니커즈를 신고 이른아침 두꺼운 파카에 손을 쑤욱 내밀고 온통 바쁜 세상을 남일처럼 말갛게 바라보는 유치한 즐거움을 누리고자 오전 열한시쯤 커피숍에 들렀다.

#2. 전화 한통화. XX 치과인데요...(네?)&&사이트에 글쓰신거 있으신가요......(그런데요?- 왜 냉큼 이실직고했는지는 아직도 분하다.) 오해를 좀 풀어드리고 삭제를 좀 해달라고 전화드렸어요...blah,blah,,,(듣고 보니 오해라기 보다는 그쪽의 해명이었고 썩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오해라고 하니 오해라고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누가 썼는지 여기저기 찾다가 그쪽 아이디로 검색을 해 보니까, 나이랑 성별이랑, '돌아다닌 사이트' 다 나오거든요? (헉. 이게 무슨 소리? 대체 내가 '돌아다닌 사이트'라니 ) 그러니까 제가 답변 달아놨으니까 보고 글 쓴거 삭제해주세요( 일단 확인해볼게요)

#3.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치과를 소개하는 사이트에 다른 사람들처럼 ....이러이러하니 참고하시라...라는 멘트를 달았을 뿐인데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검색을 한 후, 이런저런 정보를 찾고 나서 내게 확인전화하여 삭제를 요청하는 발상이라니. 게다가 '돌아다닌 사이트랑 개인 정보 다 나온다'라는 말을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

#4. 개인정보가 나온 사이트는 해당 포털에 문의해 해결을 했고, 문제는 그 치과 담당 실장이라는 사람. 몇 번 다시 생각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면 서로 공개적으로 수정하고 설득을 하면 될 것인데, 굳이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 놓고서는 내게 전화해 반협박성의 삭제요청을 하다니. ㅎㅎ

#5. 요청한대로 정말 그것이 오해라면 수정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수정기능이 없어 삭제.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이런 문제해결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네들의 발상이 참을 수 없었다. 좋은 말만 듣고 비판적이거나 객관적 정보에 대해서는 기어코 싹을 죽이겠다는 발상인 것이다. 나는 이 일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게시판에 다시 올렸다.

#6. 저녁에 원장이 전화가 왔다. 결코 사과하지는 않고 '마음을 풀라'고 했다. 내가 토라진 줄 아는 것일가.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개원한 지 얼마 안돼 소개글을 보고 사람이 많이 오는데 그런 것은 치명적이라나 뭐라나. 그런 하소연은 이 문제의 핵심이 아님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런식으로 해결하는 방식 자체가 얼마나 위험하고 문제가 있는지를 모르는 것.

#7. 흥분이 몹시 되는 일이었지만,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고 스스로 거듭 생각해 본 결과, 상식적으로 사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정보를 추적하지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방식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급 허망해졌다.

AI가 깊어져 iPod이 만들어졌다?

올해 글로벌 비즈니스계에 유행어로 꼽는 게 AI와 iPod라고 한다.

affluent influenza 풍요로움에 대한 바이러스,


Insecure, Pressurised, Over-taxed, Debt-driven

: 불안정하고, 억눌리고, 세금만 많이 물며,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영어 약자라는 것.

빚내서 자산이 잔뜩 늘자 소비가 많아졌고 수요가 많아지니 공급은 넘쳐났다.
실현이익은 아니었지만 나의 자산대비 이정도는 할 수 있지-하는 에너지가 곳곳에 넘쳤다.
미국의 위기가 세계의 위기로 이처럼 급격히 이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AI가 깊어지자 iPod가 생겨난 것.
이제 사람들은 부동산 거품과 주식 폭락으로 자산가치가 1년도 못되는 사이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빚내서 자산을 키웠던 사람들은 불안정해졌고, 서민들은 더욱 억눌리게 됐으며, 부실한 기업들 살리는 세금에 허덕이고, 고금리의 빚에 시달리는 것이다.

비관과 냉소가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점이다. 위기는 분명한데 위기를 헤처나가야할 방향을 몰라 우왕좌와 하는 모습이다. 우리 정치가 말이다.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예쁜 여자들이 넘치는 이유, 경쟁력 없는 남자들이 부끄럽지 않는 이유

블로그에 사회를 고자질하기로 맘먹기 시작한 순간.

예전에 썼던 글을 보니 재미가 있어 이리로 옮겨본다. 올해 초 L사에 재직중일 때 썼던 것.

그 때 감정이 생생히 기억난다. ㅎ 2008/03/22 10:20


일 때문에 회의를 갔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열사를 아우르는 회의를 가면 늘 남성이 다수다. 어디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가 일하는 회사의 문화는 훨씬 보수적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많다.

회의의 짬짬이 이루어지는 대화는 뻔하다. '그들만의 공감대'의 정점에는 '예쁜여자'가 있다.
모 드라마의 예쁜 여자를 보면 결혼하고 싶어질 꺼라는 둥, 어떤 계열사의 예쁜 여사원이
결혼과 임신으로 퇴사를 하였다는 둥 화제의 대부분은 예쁜 여자와 예쁜 여자의 근황으로
점철된다.

그런 대화속에서 나는 대게 방관하고 가끔은 가담한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고 불편한 것이 사실.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예쁜 여자들이 멋진 남자들보다 많은 이유가
여성들이 보다 남자들의 외모를 화제의 주제로 다루고 공공의 이슈로 만들어내고 남성동료들의
외모를 평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쁜 것이 경쟁력이 되고 예쁘지 않은 여자는 비주류가 된다는 것을 체험된 학습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여성들은 기를 쓰고 미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남성에게는 다르다.

여자들은 예쁜 여자를 이야기하고 여성들의 외모를 등급메기는 남자의 형편없는 외모를 지적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그들의 자신감을 방치하는 배려를 통해 남성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려온 것이 아닐까.

문득 심심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이땅의 남성들의 외모 하향평준화에 일조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대들의 불손함을 赦 하는 이유.

한창 늦잠자기에 몰입해있던 터라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곤욕이었다. 간만에 일찍 일어나 출근러쉬에 가담해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원무를 보는 데스크 담당자가 불손하기 이를데 없었던 것.

먼저 온 사람이 데스크에 문의를 하고 있는데 그 담당자가 대응하는 것이 시원찮다.
짜증섞인 말투와 인상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나 역시 그 담당자가 비호감으로 느껴졌다. 물론 짜증이 날 수도 있는 상화이었다. 우유부단한 아주머니가 의사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린 듯 하니까. 그래도 예의 없다고 여겨질만큼 틱틱거리는 걸 보니 옛다, 괘씸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다음 순번인 내게도 불친절은 이어졌는데, 회사 커뮤니케이션 착오로 내게 의료비청구를 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이 담당자는 적반하장으로 내게 짜증을 내더라는 것.
어허,,,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 당신 이름이 뭐냐고, 어떤 담당자이냐고 따져물었다. 그러자 착오가 생겨 그런것이라며 다른 담당 과장이 사과를 해왔다. 기분이 언짢아 그렇게 되물은 것이라며 별일 아니라고 나도 대응했지만 그 되먹지 못한 담당자는 사과도 없이 '그럼 나한테 미리 말했어야지'라며 그 담당 원무과장에게 역정을 내더라는.

요는 그렇다. 검진을 받으면서 느낀 건데 다른 간호사분들은 모두 성실하고 친절하게 업무를 하고 계셨다. 문제는 또 그 병원에 한 명 있는 의사!

흥미로운 것은 그 의사의 생김새가 그 데스크에 앉아있는 업무담당자와 정말 닮아있었다는 것
-.,- 필시 일가친적일 것이라는 강한 추측이 들었다.

숱한 신체검사, 건강검진 경험에도 그 의사처럼 "이름 맞나요?"로 시작해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끝내는 사람은 없었다. 문진표에 다른 병력을 확인하는 란을 통상 의사가 하는 것일 텐데 이건뭐 대단히 꾸며놓은 진료실에서 의사놀이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의구심과 어이없음은 끝이없지만 프로의식 강해보이는 간호사들과 검진전문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괜찮은 사람들이 제법 세상에는 많은데 의사결정을 하고 뭔가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자본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다는 생각.
그래서 변화는 훨씬 더디 오고, 예의를 갖춘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상식적인 세상은 이상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황당하고 불쾌한 건강검진의 추억을 잊기로 한 것은 그만큼 나의 오지랖이 힘을 잃어서이기도 하지만, 제 역할을 아름답게 해 내는 이 땅의 많은 소시민적 가치를 알게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만큼 수준이하의 요직자들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절망할 일은 아니다. 더디더라도 그 때는 올 테니까.